김대중 전 대통령 인터뷰는 2004년 새해를 이틀 앞둔 30일 오전 박우정 논설주간, 성한용 정치부장이 김대중 도서관을 찾아가 5층 사무실에서 1시간30여분에 걸쳐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새해 덕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국민 여러분께 새해 인사를 드리고, 새해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또한 우리나라도 국운이 융성해서 국민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한 단계 전진하기 바랍니다. 또 <한겨레>가 그동안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 애쓰신 점 평가하는 바입니다.”
인터뷰 내내 김 전 대통령은 늘 메모하고 꼼꼼히 준비하는 예전의 그 모습이었으며, 변함 없이 놀라운 기억력을 보여줬다. 이날 인터뷰는 “국내 정치 문제는 얘기 안하는 게 좋겠다”고 고사해 북한 핵문제, 남북·한-미 관계 등에 국한했다.
중국역할 사실상 우리몫
한미관계 강화 종속과 달라
-6·15 남북 공동선언 이래 3년 반이 지난 오늘 시점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되돌아 볼 때 감회가 남다를 텐데, 어떻게 평가하는지,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 …?
=여러 가지 차질도 곡절도 있었지만, 남북관계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남북관계의 긴장을 완화하는 전기가 됐다. 또 통일 원칙과 방법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통일은 평화적, 자주적 원칙에 따라서, 방법은 단계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다.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대구 유니버시아드에서 남쪽 국민들은 공산주의 반대와 동포로서의 애정을 구별하는 성숙함을 보여줬다.
또한 남북 공동선언 뒤에 북한이 드디어 개방을 확대하고 경제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쉬운 점은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 약속을 안 지킨 것이다. 김 위원장이 서울에 와서 국민들을 직접 대할 기회가 있었다면, 남북관계의 신뢰와 협력에 획기적인 진전의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문제는 북-미 관계의 진전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양자는 병행해서 잘돼야 한다. 클린턴 대통령 정부 때 상당 수준 진전된 게 조지 부시 행정부 들어 정책이 달라지며 어려운 걸림돌에 부닥쳤는데, 앞으로 잘 되길 바란다.
-2002년 7월1일 경제관리 개선조처 등 북한의 변화에서 주목해야 할 측면은 뭔가?
=북한은 상당한 변화를 했고, 더 많이 변하고자 하는데, 북-미 관계가 잘 안 풀리는 게 문제다. 대남 관계는 폐쇄와 적대에서 개방과 협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인적 왕래가 엄청나게 늘었고, 하늘 땅 바다의 모든 길이 다 열렸다. 경제에선 지난해 7·1 경제관리 개선조처를 통해 가격·임금·환율 등의 개혁과 배급제의 단계적 폐지, 독립 채산제와 성과급제 도입,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나아가게 하는 등 변화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행은 25년 전 중국의 시장 개방과 같은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했고, <워싱턴포스트>도 최근 기사에서 북한이 자본주의로 가고 있다고 쓰고 있다. 대외적으로도 미국·일본·프랑스 세 나라 빼고 거의 다 수교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런 대외 개방을 하더라도 경제개혁을 하려면 대미관계를 개선해서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등에서 돈도 빌리고,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해?배상도 받고 해야 되는데, 거기서 더는 진전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 관계가 잘 돼야 북한도 개방과 변화를 향해 더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을 때 “당신들에게는 두 가지가 중요한데, 하나는 안전이고, 하나는 경제를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둘 다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도 그걸 알고 있었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계속하시오”라고 말해 의견의 일치를 봤다. 돌아와서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그런 뜻을 전했다. 그래서 조명록 차수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워싱턴과 평양을 상호 방문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남쪽 정부와 국제사회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지금 남한과 국제사회가 분명히 인식할 점은 북한은 핵을 원하기보다 생존의 길을 열기 위해 핵을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핵 카드화를 잘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안심하고 살고 경제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와 남한은 그걸 도와야 한다. 기회를 주면서 개방을 유도해야지, 봉쇄하면서 변화를 바라는 건 효과가 없다.
-참여정부가 화해협력 정책을 계승한 평화번영 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북한 핵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으로 보는가?
=참여정부가 햇볕정책의 계승을 선언하고, 나름의 노력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핵문제가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히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잘 돼야 한다고 본다. 북한과의 관계는 잘될수록 좋다. 6자 회담에서 중국이 하고 있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핵문제 해결과 남북협력을 병행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당사자다. 주도적 구실을 해야 한다.
-크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 정상회담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핵 문제뿐 아니라 남북관계 전반의 발전을 위해서 양 당사자가 만나야 하고,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북한은 그 점에서 정상회담에 빚을 지고 있다.
-2003년 이라크 파병과 주한미군 재편 문제 등으로 한-미 관계가 시련을 겪었는데, 한-미 관계의 핵심 문제를 무엇으로 보는지?
=미국은 우리의 안보나 외교·경제·무역 등 모든 면에서 필수불가결한 우방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동북아 전체의 안정자로서 미국 역할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김정일 위원장에게 “통일 이후에도 미군은 한반도에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미군이 북한을 침공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김 위원장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것 보고 놀랐다. 한반도처럼 4대국이 둘러싼 지정학적 환경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국민 전체가 외교관이 돼야 한다. 이런 정세에서 강대국의 세력다툼을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은 세력균형이 관건이고 미국을 활용해야 한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 하겠지만 영토적 야심을 갖고 있지 않다. 문제는 한반도 문제는 반드시 우리가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나에게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하시오. 미국은 뒷받침하겠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잘 지내려는 것은 종속이 아니라 한반도 문제를 우리가 주도하려는 것이다.
-임기중 클린턴과 부시 행정부를 모두 상대하며 한-미 관계를 이끌었던 경험에 비춰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외교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지금 노 대통령은 대미관계에서 참 어려운 환경에 있다. 우리 입장 세우려고 고심하고 있는 걸로 본다. 요즘 한-미 관계가 좀 껄끄러워지고 있다는 것도 우리 뜻을 세우려고 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 아닌가.
-보수세력들은 안보불안을 이유로 유엔사와 한-미 연합사를 포함한 용산기지의 전면 이전을 반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는가?
=용산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군 사령부가 있던 치욕의 장소다. 독립국가에서 외국군대 사령부가 수도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민족 자존을 위해서나 국가 독립성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미군 2사단의 경우도 지금은 전략·전술이 크게 바뀌었고 무기체계도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군사적 관점에 입각해서 한-미 간에 긴밀히 협의해 공동의 결론을 내놓아야 한다.
-임기 후반에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임동원 특사 파견 등 북-미 직접 협상을 위해 마지막沮?노력을 기울였는데, 6자 회담에 대한 견해는?
핵은 북 생존카드 … 기회주고 개방유도를
김위원장 답방 노대통령과 회담 바람직
북한 통로삼아 중·유라시아 진출 필요
=핵문제는 북한과 미국 당사자가 해결하는 것이 제일 좋다. 북한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국제사회에 진출하도록 하면 해결된다. 그런데 서로 불신이 있으니, 서로 먼저 하라면 끝이 없다. 그러니 핵과 안전보장을 맞바꾸면서 동시에 합의하고 단계적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북-미 사이에 영 안되면, 6자 회담 속에서 나머지 4국이 제3자적 처지에서 공정한 조정안을 낼 수도 있다고 본다.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부시 대통령에게 조언을 한다면?
=부시 대통령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거듭 표명해야 한다. 또 대북 안전보장에 대한 확실한 약속을 해줘야 한다. 불침공, 불전복, 불제재 이런 것을 해주는 것이다. 그게 북한이 핵을 결정적으로 포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지금 과감하게 핵 포기 선언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아프간이나 이라크 전쟁, 그리고 리비아·이란 등의 사태를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제정세로 보면 지금 상황은 안 좋다. 지난해 10월 로스카보스 아펙 정상회담에서 장쩌민 주석을 만났을 때 중국도 북한 핵에 대해선 큰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대선 전에 해결해야 한다. 그걸 놓치면, 그 다음에 아주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서 세계 앞에 의심의 여지 없이 핵 포기를 선언하고, 그 대신 ‘당신네가 우리한테 내줄 것 달라’고 해야 한다. 그랬을 때 4개국도 지지하고, 세계가 다 지지할 것이다.
-북한이 핵 포기 선언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인지. 지금 북한은 미국이 불가침 보장을 하면 핵 포기를 한다는 쪽인데?
=미국이 먼저 어떻게 하면 포기한다는 게 아니라 먼저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현단계에서 핵을 동결시키고 그렇게 하겠다, 발가벗고 다 내놓을 테니, 당신네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얘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폐기를 요구해온 미국이 핵 포기 선언을 받아들일지 의문이 드는데?
=그래서 4개국의 조정 구실이 중요하다. 4자가 지켜만 보지 말고 양쪽에 공평한 방안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중국 러시아 등이 보증자 구실도 할 수 있다. 그랬을 때 6자 회담은 의미가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과 월드컵 4강 신화 등 신명나는 일이 많았는데, 요즘은 여러 가지로 우울하고 답답한 분위기다.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신다면?
=한국은 지금 지정학적으로 미·일·중·러 네 큰 나라 사이에 있어, 안보문제가 중요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경제적으로는 우리에게 좋은 기회도 오고 있다. 중국이 앞으로 세계에서 으뜸가는 국가로 나설 것이고, 일본은 이미 세계 2위 경제강국이다. 우리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한반도 평화, 또 하나는 북한을 통해 중국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이 우리에게 연결된다. 벌써 한-일 해저터널 얘기도 나오고 있다. 우리가 동북아 물류의 중심이 되면 보험·금융·관광 모두 일어나게 된다. 한국사람은 지적 전통이 강하고 교육수준이 높고, 문화적으로도 많은 장점이 있다. 한국 사람 성질 급한 것이 결점이라 했는데, 컴퓨터시대가 되니까 이게 장점이 되지 않았는가.
-퇴임 뒤에도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중요한 몫을 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국민들이 많다.
=난 현실 정치에서도 떠났다. 모든 일은 맡은 분들이 제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남북문제만큼은 마음으로는 관심을 기울여 협력할 것이다. 전직 대통령이 국정에 조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관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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