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추연 > 자유게시판 > [하야] 외교관 신분증은 ‘피살면허’

敵前분열… 우리는 테러·교민·서울과 전쟁을 해야했다
김선일 피살 직후, 현지급파된 한 외교관의 바그다드 비망록

외교관 신분증은 ‘피살면허’ 24시간 사무실에 갇혀
교민들은 테러경고 무시 김천호사장은 대사관 무시
“김선일은 전도사” TV보도는 “저 사람 죽여라” 나팔 분 꼴

문갑식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 2004.08.06 18:26 16' / 수정 : 2004.08.06 18:30 32'

관련특집
- 피랍 김선일씨 끝내 피살

고(故) 김선일(金鮮一)씨 피살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 앞에서 단결보다 분열을 택했으며 무고한 사람의 목을 벤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응징의 목소리는 간데 없고 오로지 안으로 눈을 돌려 누가 죽일 놈인지를 찾아 난도질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는 지적이 현직 외교관에 의해 제기됐다.
외교통상부 신상목 외무관은 김선일씨 피살 이후 한 달간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이라크 비망록 ‘이라크대사관이 치른 세 개의 전쟁’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신 외무관은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외무고시 30기 출신으로 김선일씨 피살사건 이후 지난 6월 29일 주이라크 한국대사관 근무를 자원했으며, 최근 국정조사를 받기 위해 귀국한 임홍재 대사 일행과 함께 복귀했다. 다음은 조선일보가 6일 단독 입수한 200자 원고지 119쪽 분량의 비망록을 요약한 것이다.

정부에대한 불신과 불만

이역만리 척박한 땅에서 꿈을 안고 인생을 개척하던 한 청년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 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온 나라의 비극이 되었고, 종국에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신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서 진실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그리고 그 진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을 접하면 접할수록 마음은 돌을 매단 듯 무거워져만 갔다. 과연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느낀 저주에 가까운 분노가 옳은 표적을 향해 분출된 것인가?

우리 청년의 숭고한 목숨을 앗아간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 앞에서 우리 사회는 단결보다 분열을 택하였다. 야만의 칼을 쳐들어 무고한 사람의 목을 벤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응당 있어야 할 응징의 목소리는 간데 없고 오로지 안으로 눈을 돌려 누구 탓인지, 누가 죽일 놈인지를 찾아 난도질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적전분열(敵前分裂). 이번 사건을 맞아 우리 사회가 보인 모습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테러리스트들이 흐뭇한 미소를 흘리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한국에 대한 테러에 재미를 붙여 제2, 제3의 범죄를 획책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순간의 난폭한 감정 발산이 가져올 수도 있는 결과를 국익의 관점에서 가늠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이라크에서는 반군은 맨 얼굴로, 치안유지군은 보복을 우려해 복면을 착용하는 이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바그다드=문갑식기자 [email protected])

테러경고 무시한 교민들

김씨 피살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이라크 대사관 직원에게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연루된 모든 납치 사건의 경우 당사자 모두가 위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관에서 수차례 신변안전 조치를 촉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하였다는 데 있다. 일례가 지난 4월 팔루자 지역에서 납치된 종교인 일행이 만류에도 불구, 입국을 강행했다가 사고를 당한 경우다. 구사일생으로 석방된 이후 이들이 공관에게 한 말은 “왜 인천에서부터 만류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김씨 사건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라크 대사관은 그동안 김씨가 고용된 가나무역에 대해서 수십 차례에 걸쳐 안전조치 강화를 당부해 왔다.

특히 가나무역에 대한 테러첩보가 입수된 5월 중순에는 즉각 가나무역에 두 번이나 연락을 취해, 팔루자 등 위험지역에 한국인 직원의 출입을 삼가고 물품운송시에는 현지인 직원만을 이용할 것, 불가피한 외부 출입시에는 반드시 무장 경호원을 대동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구체적 지침을 전달하고 즉각 시행을 촉구하기까지 하였다. 김선일씨가 운전기사와 단 둘이 팔루자로 출장을 떠나기 고작 보름 전의 일이다.

중동 정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팔루자가 어떤 곳인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김씨 피살 이후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과 다른 직원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은 팔루자 지역이 과히 위험하지 않으며, 지역 주민들이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는 등 자신들이 출입해도 신변 안전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고 한다. 도가 지나친 안전불감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천호 사장은 김선일씨의 실종 사실을 대사관에 일절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대사관에 알리자는 부하 직원의 의견까지도 묵살하면서 함구령을 내리기도 했다. “대사관에 알려봐야 도움이 안 되고 자체적으로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는 자신이 전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김선일씨의 구출 활동을 수행할 것이며 대사관을 이 사건에서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아니다.

외교관 '창살없는 감옥생활'

많은 사람들은 외교관하면 흔히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서 고급 와인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외교관 신분증은 ‘피살면허(license to be killed)’일 뿐 호사스런 삶과는 거리가 멀다.

이라크 대사관 직원들의 사무실은 곧 침실이다. 세 평에서 다섯 평 정도의 크기인 각 방에는 책상과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돌아와 침대 옆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본다. 업무가 끝나면 다시 세 발치 떨어져 있는 침대로 자리를 옮겨 잠을 청한다. 출·퇴근 시간이 3초라 편하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24시간 같은 방에 갇혀 지내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달가울 리 없다.

무책임한 한국 TV

김선일씨의 피랍을 맞아 서울의 언론이 보여준 행태 또한 대사관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었다. 중동에 거주하는 한 교민은 한 인터넷 언론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나와 아내는 김선일씨가 전도사이고 돌아오면 목사 안수를 받고 중동 선교를 하기로 했다는 방송이 TV에 나오는 것을 보며 ‘저놈의 한국 언론이 저 사람 죽이네!’라고 거의 비명을 질렀다. 아랍사람들이 기독교인 보기를 자기 부모 죽인 원수처럼 보는데 목사된다고 선교하러 이라크 갔다고 그렇게 전 세계를 향해 나발 불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우리 언론의 보도 행태가 납치범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김선일씨를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실린 그들의 살해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웹사이트는 아랍어로 “이 이단자(김선일씨)는 미군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기독교 회사에서 일을 하며 이 회사는 수익의 10%를 이슬람 국가 내 기독교 전파 및 선교에 책정하였다.

또한 이단자는 기독교 신학 전공으로 목사 희망자이며, 이러한 사실은 한국의 뉴스 통신, 로이터 통신이 다음과 같이 영어(뉴스)로 보도한 바 있다”라고 살해 이유를 밝히면서 로이터 통신이 우리 언론의 보도를 인용한 기사 원문을 함께 게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앞으로 우리 국민의 피랍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국이 우선적으로 협상해야 할 대상은 납치범들이 아니라 서울의 언론인지도 모르겠다.

외교의 위기인가 국민의 위기인가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 국민들은 줄기차게 규제 혁파와 자율 보장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막상 일이 닥치면 일단 정부에 책임을 묻는 구태의연한 습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미 국제사회의 치열한 국익 각축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취한 능동적 선택의 결과이지, 과거처럼 억지로 떠밀려 감당해야 했던 숙명적 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명, 재산이 외부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 이기적이고 안이한 현실 인식이다.

이는 단지 우리의 파병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인지 아닌지를 따지려는 특수한 ‘한국사적’ 상황에 대한 미시적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그토록 갈구해 온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이 가시화되면서 나타나는 도전과 희생을 우리가 얼마나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소화하느냐는 거시적 자각의 문제이다.

목적을 쟁취하기 위한 능동적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된 지 오래임에도 과거의 트로마(trauma·외상 또는 정신적 충격)에 사로잡혀 수동적, 약소(弱小)적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김선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사회는 또다시 같은 홍역을 치러야 할 것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홍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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