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벨기에式 해법 주목하라
열강 속에서 살아남기 ‘아시아 연합’을 서울에
▲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지난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열린 한 국제법회의에 참석한 후 만찬석상에서 만난 벨기에의 저명한 변호사는 “주한미군 4000명을 이라크에 차출해 보낸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한국전쟁 참전국의 하나로서 한반도 안보공백이 우려된다”며 향후 대책을 걱정했다. 우리는 벨기에와 한반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장시간 토론하며 양국의 역사적·지리적 특성이 상당 부분 일치함을 발견했다.
한반도가 중국·러시아·일본이라는 강대국에 둘러싸인 것처럼 벨기에는 독일·프랑스·네덜란드·영국의 중앙에 위치하여 주변국에 의한 무수한 침탈 및 식민지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벨기에는 주변 정세 변화에 긴밀히 대처하면서 꾸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작지만 큰 나라로 성장하였다.
2차대전 이후 전쟁공포증에 빠져 있던 서유럽 국가들은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미국과 극적인 합의를 통해 1950년 가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했다. 초대 사령관은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장군이 맡았으며, NATO는 유럽과 미국의 공조를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 평화 유지의 근간이 되었다.
1967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영·미 간의 갈등을 벨기에는 새로운 기회로 삼았다. NATO 본부를 프랑스 밖으로 옮겨야 할 시점이 오자 벨기에는 서슴지 않고 200헥타르의 군사훈련장을 제공했다. 단 하루의 공백도 없이 NATO 본부를 벨기에로 옮겨놓는 데 성공하면서 NATO 내에서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1950년 프랑스 외무장관인 로베르 쉬망이 군사적 충돌과 분쟁 해소를 위해 유럽 통합을 제안했다. 그 후 40년 동안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유럽경제공동체(EEC)→유럽공동체(EC)를 거쳐 1990년 유럽연합(EU)이 탄생했다.
벨기에는 EU본부 유치에도 성공함으로써 이제는 서구뿐 아니라 동구의 일부까지 포함하여 25개국 4억6000만 유럽인들의 삶을 설계하는 중추신경이 되었다. EU의회는 안보뿐 아니라 경제·문화·사회·환경 등 모든 분야에 관해 토론하고 법을 제정하는 민주적 절차를 브뤼셀에서 구축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EU 각국에서 몰려온 국장급, 차관급, 장관급 회담이 브뤼셀 곳곳에서 개최되고, 전 세계 수천명의 로비스트들이 브뤼셀을 드나든다. 이것이, 경상도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영토지만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는 선진국이 된 비결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이 동북아 중심국가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북한 핵과 주한미군의 변화로 한반도 주변정세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안보공동체와 경제공동체 개념을 통해 유럽의 중심이 된 벨기에식 해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는 한·미동맹을 공고히 유지하면서 6자회담(남북한, 미, 일, 러, 중)을 발전시켜, 유럽처럼 아시아·태평양 안보조약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환경·문화 등 제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아시아 연합(AU)’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EU처럼 동북아를 하나의 경제공동체로 만드는 협상, 회의, 법령 제정 과정에서 ‘아시아 연합’의 본부를 서울에 유치한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안보·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다.
EU의 관료들은 지난 50년보다 앞으로 EU의 갈 길이 더 멀고 험난하다고 예측한다. 우리도 장기적인 안목, 인내, 자부심을 가지고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동북아의 진정한 허브가 되는 첩경이다.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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