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삿갓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님께...
제게 있어서 님을 대통령님이라 호칭하는 것이 너무도 어색하여 늘 하던대로 선생님이라 부르겠으니 널리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이란 호칭 외에는 세상 어떤 호칭을 님의 이름 석 자에 갔다 붙여도 존경과 사랑의 념을 표할 길이 없기에 군부독재 하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고난을 겪으시면서 자연스레 저의 입에 붙었던 ‘선생님’으로 부르렵니다.
해방후 이 땅이 둘로 나뉘고 결국은 전쟁의 참화를 겪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목포 유치장 안에서 인민군에 의해 처형당하기 직전에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셨고 그 이후 국민이 주인되는 세상, 남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 세상을 꿈꾸고 정치에 입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 차례에 걸쳐 낙선을 거듭하신 끝에 급기야 4.19직후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셨지만 5.16 군사구테타로 인하여 의원선서도 못해보시고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당의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 정치인으로서 빛도 못보고 스러져갈 위기에서 7전8기의 의지로 재기하셔서 박정희 정권에서 최대의 위험인물로 낙인찍혀서 지난한 고난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박정희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민주당(당시 신민당)의 대통령후보가 되셔서 박정희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선전을 펼치셨고 실질적으로 그때 이미 국민들은 선생님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공공연히 자행되던 부정선거만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30년 이상 앞당길 수 있었고 이미 조국은 통일이 되어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작금의 현실이 너무도 서글퍼집니다.
선생님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총통적 지위를 누리며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선생님의 일거수 일투족은 늘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어진 납치와 감금과 수형생활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형극의 길이었지요. 권력의 힘에 눌려 민중들은 숨조차 쉬기가 힘들었지만 언제나 선생님의 소식은 국민들에게 희망이었고 삶의 등불이었습니다. 사악한 독재자와 포악한 정권 하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선생님의 투쟁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은 동굴 속에 비치는 한 가닥의 빛이었습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선생님이 계셨고, 또 선생님이 계셨기에 그 숱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기꺼이 투사가 되어 싸울 수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바치며 숱한 열사들이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의 신념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은 김재규의 손가락을 통해 독재의 심장부 박정희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게 하였고 우리는 10.26 새벽에 만세를 부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그날 새벽은 참으로 상서로웠습니다.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장중한 음악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올 때 저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불노장생할 것같았던 박정희가 죽고 유신독재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던 그날 아침을 기억하십니까? 국민과 민주당의 승리였습니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대학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시키고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고 노동자 농민은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며 현장에서 즐거운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남몰래 선생님의 강연테이프를 들으며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다져갔었지요. 마침내 ‘서울의 봄’이라는 꿈에도 그리던 민주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그러나 5.17일 전두환 일당이 전국계엄을 선포하고 민주화의 꿈을 무참히 짓밟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광주에서는 권력욕에 미친 신군부의 주구들이 광주를 무참히 도륙하고 난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광주여! 동토의 땅에 홀로 핀 의로운 꽃, 무등산이여!!
선생님, 우리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들 앞에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하는 고난이라면 차라리 즐거웠습니다. 광주는 선생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불의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저항이요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입니다. 해방구 광주는 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진압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해방세상, 대동세상이 무엇인가를 맛보았기에 죽은 자를 대신해서 산 자의 몫을 감당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싸우겠노라고 다짐했었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마침내 6.29를 통하여 그들은 항서를 썼으나 그것은 기만이었습니다. 광주에 대한 모독이었고 역사와 민족에 대한 또 다른 반역이었습니다.
민주화를 향한 열망과 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가치를 호남이라는 지역구도 속에 가두고 그들은 반 쪽 나라를 호남과 비호남으로 철저히 나누었습니다. 그것을 저는 ‘영남부족주의’라 칭합니다. 호남을 고립시키고 선생님을 때리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적으로 차지할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광주는 두 번, 세 번 짓밟혔고 능욕을 당했습니다. 급기야 선생님은 눈물로 정계은퇴를 선언하시고 헐벗고 멸시받는 국민들 곁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3일간 폭음을 하며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그처럼 절망적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민과 함께 해왔던 민주당은 둘로 쪼개져 그 한 토막은 김영삼이가 들고 적진에 투항했으며 나머지 반쪽도 구심점을 잃고 민심과 함께 표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떠난 한국은 영남부족주의가 극성을 부리며 국민을 분열시켰고 권력의 부패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희망이 없던 그 시기에 마침내 선생님께서 귀국하셨고 정치 재개를 선언하셨지요. 기억하십니까? 선생님이 정계은퇴를 선언하실 때 최고의 찬양가를 불렀던 그 언론들이 똑 같은 지면과 필진으로 얼마나 매도하며 병적인 발작증세를 부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마치 박정희가 부활한 듯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은 비단 저뿐만 아니었을 것입니다.
광주가 상징하는 것은 민주화된 세상이요 통일 조국이며 차별 없는 대동세상입니다. 그 광주가 선생님의 귀국으로 다시 원기를 되찾았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양심세력이었다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지도부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광주를 팔아먹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꾸던 시절에 선생님은 광주를 보듬고 우셨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노벨평화상을 받으신 것은 극히 조그만 보상에 불과한 것이건만 저 간악한 무리들은 그것마저 폄훼하고 있습니다. 그 상은 선생님과 함께 싸워온 민주당과 이름 없는 국민들과 목숨을 바쳐 산화해 가신 열사들의 몫임을 저들은 부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셨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님은 그 보다 크시고 높으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어려운 IMF시절에 아플 시간도 없다는 말씀대로 노구를 이끄시고 환란극복을 위해 애쓰셨고 남북화해와 공존의 틀을 닦으시려 노심초사하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국가경제는 재건되었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통일의 초석이 놓여졌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민주당은 정권을 재창출하였고 국운은 욱일승천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노무현과 그 일당들은 햇볕정책을 철저히 난도질하고 국민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놨으며 국론은 철저히 분열되어 난세도 이런 난세가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선생님, 지금 이 상황이 님이 그토록 싸우시며 꿈꾸던 세상입니까? 목숨마저도 버려가며 지키려고 했던 그 세상이 맞습니까? 이 순간에도 어떤 가장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유서를 쓰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떤 곳에서는 민간인이 한국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살해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금 남과 북이 불신하고 있습니다. 독립국가로서의 자주권이 상실되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님은 정치인을 떠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대에 국민들의 희망이었고 등불이십니다.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 선생님은 정계를 은퇴한 분이라고도 하고, 이젠 쉬셔야 한다며 선생님을 묶어두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데 나이도 직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도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정적들의 견제 속에서도 백의종군하여 마침내 왜적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했습니다. 만약 그 때 이순신 장군께서 일어서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우리의 역사는 더 비참했을지 모릅니다.
선생님, 이제 일어서십시오. 다시금 역사와 민족을 위해 무릎에 힘을 주십시오. 선생님을 편히 쉴 수 없게 만든 세상이 원망스럽습니다만 그렇다고 한숨만 내뱉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은 대통령을 뛰어넘으신 그 무엇이시기에 감히 당신의 출사를 요청드립니다. 간악한 무리들이 선생님의 지도력을 알기에 발악할 것은 자명합니다. 그것을 두려워 마십시오. 역사와 국민은 언제나 선생님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선생님의 사상이 오롯이 배어있는 민주당을 도와주시고 노무현의 배신에 치를 떨고 있는 국민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존경하는 백범 선생님께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자신의 소원이 통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분을 같은 반열에서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무한한 존경심으로 선생님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통일의 그날에 선생님의 손을 잡고 백두산에 오르고 싶습니다....
광주에서 단두대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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