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乙酉年)은 좋아, 복 터졌어. ” 사람들은 이런 말이 듣고 싶다. 힘겨웠던 한 해를 보낸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역술의 세계에서 새해 첫날은 설날이다. 설을 앞두고 서울 종로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며 조선일보에 6년째 ‘오늘의 운세’를 연재하고 있는 역술인 엄창용(嚴昌鎔·71) 관장의 조수로 일하며, 새 출발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설날 기대와 고민을 들어봤다.
한 중년 부부가 철학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자리에 앉자 엄 관장이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물었다. “저는 1955년 ○월 ○일 축시(丑時), 아내는 1957년 ○월 ○일 인시(寅時)예요”라고 남편이 답했다. 의류업체 하도급 일을 한다는 부부였다.
엄 관장이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자미두수(紫微斗數·별자리를 통해 운세를 보는 법) 프로그램에 입력하자 곧 암호문 같은 화면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죽어라 일해도 돈이 안 모여요. 직원들 월급도 제때 못 주고. 집터가 나쁜지…. ” 아내가 한숨과 함께 토해낸 말이다.
“부부 궁합은 좋고. 어디 보자…. 올해는 재운(財運)도 괜찮은데. 돈 좀 벌겠어. 아들 녀석이 8월에 제대한다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래. 연말에 시험 보면 원하는 곳에 취직할 수 있어. 이 녀석이 효자야. 아들은 잘 뒀구먼 뭐. ”
“정말요? 올해는 살림이 좀 피겠습니까?” 남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허, 안 믿으려면 왜 왔어. 회사는 마누라 앞으로 옮겨. 여자가 재운이 있으니. ” 엄 관장의 말에 부부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나한테 왜 고마워. 사주가 그런걸.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좋아. 걱정 말고 열심히 살아. 그래도 조심해. 너무 큰 투자는 하지 말고. ” 엄 관장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올해 서른이 된 한 여자 대학원생은 새해 취업운과 결혼운을 보겠다고 했다. 그는 “설날에 친척들이 모이면 또 언제 결혼할 거냐, 취직은 되는 거냐고 물을 게 뻔하다”며 “겉으로는 ‘당당한 독신 커리어 우먼으로 살겠다’며 태연한 척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찾아왔다”고 했다. 엄 관장이 “올해 결혼운은 없지만 가을에 시험운이 있으니 열심히 준비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찡그린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을 짓더니, “요즘 같은 때 취직된다는데, 결혼은 한두 해 미루죠, 뭐”라고 말하며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차례는 서울 방배동에 사는 40대 중반의 여자. 미국에 유학 보낸 스무 살 아들이 그곳에서 사귄 여자친구와 궁합이 맞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사주를 풀던 엄 관장이 “한배를 타지 못했어. 안 맞아. 그런데 왜 그렇게 급해? 사고라도 쳤어?”라고 물었다. “그건 아니고…. 안 맞으면 정들기 전에 떼어 놓아야 하니까…. 그런데 군대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안 보낼 생각이야? 애를 너무 귀하게 키웠어. 당신 아들 놈은 거칠게 키워야 맞는 사주야. 내년쯤 돈을 써서라도 전방으로 보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 엄 관장의 호통에 그녀는 “돈까지 쓰는 건 좀…”이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갔다.
이어 들어온 40대 남자는 여덟 살 난 둘째아들의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사주가 법조계에 맞는지도 물었다. 그는 “명문 법대를 졸업했는데, 고시(高試)에 실패하고 금융계에 다니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둘째 놈이 나를 많이 닮아 기대가 크다”고 했다.
이후 손님이 뜸했다. 철학관도 경기(景氣)에 민감하다. “돈이 돌 때는 사람들이 밀물 같지.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이들 찾아와 물어. 그런데 작년에는 손님도 적고, 오는 사람들도 언제 가게 문 닫을까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올해 우리나라 운세가 작년보다는 좋아. 차츰 안정기로 접어들 운이니, 손님도 늘겠지?” 엄 관장이 말했다.
두 시간 만에 40대 초반의 여자가 들어왔다. 직장을 옮길 수 있는지 물었다. 엄 관장이 “남편과 궁합이 안 맞아 눈물 흘릴 일이 앞으로도 많겠다”고 하자, 그녀는 “상관없다. 내 일만 방해하지 않으면 신경 안 쓴다”고 말했다. “올해 합격운이 있으니, 실력에 맞게 직장을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엄 관장의 말에 싱긋 웃었다. 남편과의 궁합을 좀더 보자는 말에도 그는 “괜찮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과를 마치고 책상을 정리하던 엄 관장이 기자에게 한마디를 했다. “사람의 운명은 사주와 환경, 그리고 노력에 달려 있어. 사주와 환경은 타고나는 것이고, 노력은 자신에게 달렸는데, 가장 힘써야 할 것이 가정이야.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데, 바깥일 잘 되는 사람은 없어. 혹 있다 하더라도 결코 행복하지 않아…. ”
71813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