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생활을 한 지 벌써 15년째가 되었지만, 그동안 맡은 형사사건을 다 합쳐도 10건이 안 된다. 형사사건을 수임해보려 한 적도 없고 어쩌다 주변 사람이 사건을 맡기려 해도 ‘능력’있는 다른 변호사를 소개해준다. 억울한 사람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도 웬만해선 무죄 판결을 받기 어려운 시스템 때문이다. 요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잘못된 시스템의 근간을 바꾸자는 것인 듯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무죄를 기대할 수 없을 때 많은 사람들은 거짓으로라도 얼른 죄를 시인하고 관대한 처분을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때 변호사 능력도 법정의 변론보다는 법정 밖에서 검사나 재판부에 대한 영향력으로 평가된다. 관대한 처분이 살 길이라면 당사자는 ‘끈’이 닿는 변호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특정 재판부와 연고관계가 있는 변호사를 찾아주는 직업까지 생긴 지경에 이르렀다. ‘전관예우’가 사라질 수 없다. 검사 출신 변호사가 전화 한통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후배 이름으로 수임하고 자신은 법정외 변론을 맡는 걸 막을 방법은 없다.
이렇게 왜곡된 현상은 유죄 처리는 쉽고 무죄 처리는 어렵게 만드는 시스템이 원인이다. 유죄 처분은 정말 쉽다. 유죄와 무죄의 증거가 섞여 있을 때 검사는 유죄 증거만 골라서 기소하면 되고, 재판부도 유죄 증거만 골라서 유죄로 판결하면 된다. 무죄 증거를 왜 안 믿는지, 그리고 유죄 증거를 왜 믿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무죄판결 어려운 왜곡된 체계-
반면에 무죄 처분을 하려면 논문 한편을 쓰는 것과 같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유죄의 증거 하나하나가 왜 믿을 수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판사는 웬만한 사건에서 유죄 증명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어렵게 무죄 판결을 쓰기보다는 피고인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관대하게 ‘타협판결’을 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억울한 사람을 줄이려면 무죄 판결 쓰는 것을 쉽게 만들어야 한다. 한 나라의 사법제도 수준은 무죄 판결 쓰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로 평가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검사가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을 받아내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배심원들은 유죄로 납득하기에 증거가 불충분하면 무죄로 평결한다. 유죄 판결은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만 있으면 되고, 우리나라처럼 무죄 이유를 쓸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죄를 받기 어렵고, 특히 검사 앞에서 한번 자백하면 사건은 사실상 끝난다. 일단 자백하게 되면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정황증거만으로 유죄 판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판례이고,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은 법원에서 번복해도 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현행 시스템 아래서는 검사 앞에서 진술한 조서가 그대로 법원에서 인정되기 때문에 검사가 판결을 90%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 수사과정에서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는 충분히 보장되지 않고 있다.
검찰의 막강한 권력은 헌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헌법은 미국 헌법과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도 막상 돌아가는 시스템은 인권보장에 미흡하다. 광복 60년이 지나도록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사개추위가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이처럼 무죄를 받기 힘들게 하는 시스템의 근본을 바꾸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피고인을 법정에서 검사와 대등하게 다투게 하고 유죄 인정을 쉽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헌법을 개정하는 것에 견줄 만큼 의미를 가진다.
－인권 보장위한 형소법 개정을-
이 개정안을 ‘수사권 제한’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수사 활동을 제한하는 내용은 없다. 핵심 조항은 피의자가 법정에서 자백을 번복할 경우 검사가 작성한 조서를 자백의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검사 앞에서 한 진술을 쉽게 번복할 수 있다면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늘어날 것은 틀림없다. 검찰은 현행 시스템을 바꾸면 범죄자들이 활개칠 거라고 하지만 그런 문제점은 다른 방법으로 보완하여야 할 사항이다.
우리가 사법 후진국을 면하려면 무죄 판결이 쉬워지도록 틀을 바꿔야 한다. ‘죄인 열 사람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한 시민을 만들지 말라’는 선진형 인권 보장 정신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형사 시스템의 중심에 들어서는 것을 기대해 본다.
〈고승덕/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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