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들끼리 농담처럼 들먹이는 세금 중에 노인세(老人稅)가 있다. 퇴직자, 연금생활자, 은퇴자들은 젊은 층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기 때문에 세금을 쉽게 거둘 수 있다는 발상이다.
물론 정부가 새로운 세원(稅源)을 발굴할 때 노인을 상대로 세금을 늘리겠다고 직접 표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인 금융자산과 실물자산의 대부분을 중년 이상 노년층이 소유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노인들 주머니와 지갑을 털어내려고 정부가 얼마나 머리를 쓰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는 개인 자산의 70%를 60세 이상 노인들이 소유하고 있다. 개인 자산 속에는 금융기관 저축과 주식, 부동산이 모두 포함돼 있다. 60세 이하 나머지 모든 연령층이 갖고 있는 자산이란 노인층이 갖고 있는 자산 규모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말이다.
통계가 없어 전문가 분석이 엇갈리지만, 우리나라도 개인 자산이 점차 노년층에 편중 소유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40대 이하 연령층은 자산형성 과정에서 고도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50대 이후 중·고령자층은 명퇴 위협을 받지 않은 채 평생 안정적인 월급을 받았거나, 조상에게 물려받은 농지(農地)에 아파트나 공장이 들어서 자산이 저절로 축적됐거나, 투자가치가 높은 아파트를 찾아 열심히 이사 다니며 보유자산을 극대화시킨 ‘대박’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경제 관료나 정치인들이 재정이 궁핍할 때 이 계층을 노리는 것은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이 정권 들어서 만들어진 부동산종합과세 제도가 좋은 사례다.
얼핏 보기에는 재벌 총수나 부동산 투기로 한탕한 자산가 3만여명이 주요 타깃인 듯하지만, 실은 임대소득으로 퇴직 후 생활비나 충당하려고 소박하게 노후(老後)설계를 했거나, 평생 눈동냥 귀동냥으로 자산을 늘려온 이웃 중산층들이 재산세를 많이 내게 됐다.
2만명에 가까운 금융자산 종합과세 대상자 중에도 대기업 사장이나 재벌 2세, 3세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은행권 인사들은 말한다. 그보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산가들, 즉 금융상품으로 꼼꼼히 재산을 증식시켜 온 평범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한다.
재벌 총수나 그 가족들은 여러 방법으로 절세(節稅)하고 해외에서 자금을 굴리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개인 자산과 관련된 세금을 그다지 많이 내지 않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 보유 자산에 매기는 각종 세금은 결국 주변머리 없는 보통 노(老)중산층을 겨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계층은 각종 선거에서 투표권을 집단 행사할 만큼 아직 정치세력화되지도 못했다. 미국에서는 은퇴자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 부시 대통령도 작년 가을 대선을 앞두고 어느 퇴직자 단체의 총회에 다른 일정을 다 미루고 참석해야만 했었다.
우리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개혁과 정의를 앞세워 ‘부자에게 더 무거운 세금을 매기겠다’고 현혹하는 데 너무 쉽게 넘어간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을 냈어야 할 진짜 부자들은 빠져나가고 나중에 중세(重稅) 올가미에 걸려드는 대상은 바로 우리의 고지식한 부모들이고, 성실하게 자산을 불려온 이웃사촌이다.
우리나라도 퇴직자나 연금생활자, 노인을 더욱 우대하는 금융 상품과 세제(稅制)를 도입해야 한다. 노년층에는 이자·배당 소득세를 낮춰주고, 20년 이상 한 집에서 줄곧 살아온 퇴직자에게는 재산세를 감면해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자산가가 세금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다만 평상시 고정 수입이 적은 노인층에 혜택을 더 달라는 얘기다.
요즘 정부는 국내 경기가 다 회복된 듯 법석을 떨고 있다. 대통령도 설 선물을 배포, 소비 진작을 위한 제스처를 취했다. 모처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은 너무 방탕해 포기했던 아들이 느닷없이 고시공부하겠다고 책상 앞에 앉은 모습을 보는 심정이다. 한편으로는 뿌듯하지만 언제 뛰쳐나갈지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경제 올인(all-in)’ 선언을 지켜보고 있다.
만약 정부가 경제 올인 분위기를 이어가려면 여러 가지 대책 중 하나로 국내 소비를 이끌어갈 자산가 계층이 누구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노년층을 무거운 세금을 매길 대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출처 : 조선일보 2005년 2월 3일자 송희영 출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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