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을 비난하는 글을 썼습니다. 지난 18일 사개추위가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내용으로 형소법 개정안을 의결하는데 천 장관이 앞장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는 줄 압니다.
"이번에 의결된 형소법 개정안에는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데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것 아니냐. 그렇다면 현행 형소법 보다는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인데 천 장관을 마치 변절자인양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
일반인이 이러한 의문을 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과연 이번 개정안이 현행 형소법에 비해서 진일보한 것인지 꼼꼼히 따져 봅시다.
개정안이 현행 형소법보다 진일보한 것이다?
검찰에서 범행을 자백한 사람이 법정에서는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에 자백이 기재된 조서를 증거로 취급할 것인지 여부가 이번 사개추위에서 핵심 쟁점이 된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 문제입니다.
현행 형소법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춘 경우에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①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의 내용이 자기가 진술한 대로 기재되었음을 인정하고 (성립의 진정)
② 그 조서가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작성된 때 (특신상황)
한편, 이번 개정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합니다.
① 피고인이 법정에서 조서의 내용이 자기가 진술한 대로 기재되었음을 인정하거나, 또는 그 조서가 피고인이 진술한 내용대로 기재되었음이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인 방법으로 증명되고 (성립의 진정)
② 그 조서가 변호인의 참여 하에 이루어지는 등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 하에서 작성되었음이 증명된 때 (특신상황)
이렇게 보면 현행법과 개정안은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요건으로 ① 성립의 진정과 ② 특신상황을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선 '성립의 진정'에 대해서 봅니다. 현행법에서는 반드시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 조서의 내용이 내가 진술한 것과 동일하다"고 진술을 해야만 성립의 진정이 인정됩니다.
그러나 개정안에서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 조서의 내용은 내가 진술한 내용과 다르다"고 주장하더라도 영상녹화물 등 객관적인 방법으로 성립의 진정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현행법 보다 '성립의 진정'을 인정할 수 있는 요건을 완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수사기관의 입장에서야 환영하겠지만 피고인의 방어권은 형편없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영상녹화물이나 기타 객관적인 자료는 얼마든지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특신상황'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개정안에서는 "변호인의 참여 하에 이루어지는 등"으로 기술하고 있어서 마치 특신상황의 요건이 한결 엄격해 진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꼭 변호인의 참여가 아니더라도 특신상황을 인정할 수 있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등"이라고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는 수사단계의 피의자에 대해서는 국선변호인 제도가 없습니다.(체포·구속 적부심 신청의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국선변호인 제도가 있음) 따라서 돈이 없는 피의자들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개정안에서는 수사기관이 변호인의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여지를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특신상황은 '변호인의 참여'가 아닌 기타 다른 방법으로 인정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특신상황'의 요건이 현행법보다 엄격해졌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래 법원이 수백만건의 형사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특신상황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검사 조서의 증거능력을 배제한 사례는 고작 4~5건에 불과합니다. 현행법과 다를 바 없는 '특신상황'의 요건은 사실상 유명무실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개정안은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요건 중에서 '성립의 진정'에 대해서는 현행법보다 크게 퇴보하였고, '특신상황'에 대해서는 현행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로 개정안은 인권보장 면에서 현행법 보다 진일보하기는커녕 크게 후퇴한 것이라고 평가해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증거능력이 인정되더라도 법관이 자유심증에 의해서 증명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되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
증거능력이 있다는 말은 법정에서 증거로 사용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라도 그 증거가치 즉, 신뢰성은 천차만별입니다. 이것을 '증명력'이라고 하지요.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라도 법관이 이를 신뢰치 않고 배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증거능력 있는 증거가 다름 아닌 피의자의 '자백증거'라는 것입니다. 법원이 증거능력이 인정된 자백증거를 그 신뢰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피의자가 자신에게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였는데 왜 믿지 못하는가, 그 믿지 못하는 이유를 대기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검사는 자백만 받아내면 아주 쉽게 유죄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래서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사법개혁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에서는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 요건도 오히려 완화시켜 놓았습니다. 또한 영상녹화물까지 증거로 이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가히 검찰의 수사를 재판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혹자는 영상녹화물이야말로 진술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므로 가장 진실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사가 얼마나 쉽게 억압될 수 있는지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일단 고문을 받으면 그 공포심은 상당기간 유지됩니다. 고문 후에 억압된 상태에서 녹화된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보장할 것입니까?
사람의 의사를 억압하는 것은 고문뿐이 아닙니다.
A라는 정치인과 친한 B라는 사업가가 있다고 합시다. 검사가 A를 손봐주기 위해 B 회사의 탈세사실을 포착한 후 B에게 "A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자백하라. 그렇지 않으면 탈세혐의로 구속하고 막대한 추징금을 부과하여 회사 문을 닫게 하겠다"라고 회유 내지 협박을 할 수 있습니다. B가 이러한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A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자백을 하면 검찰은 그 장면을 녹화하겠지요.
뒤늦게 잘못을 뉘우친 B가 법정에서 "나는 뇌물을 주지 않았다"고 부인하더라도 B의 자백은 증거능력을 갖게 되고, 이러한 B의 자백은 A의 입장에서는 공범의 자백이므로 A도 유죄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는 방법은 오직 수사기관 작성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개추위가 지난 5월에 내놓았던 형사소송법 개정안이었지요.
그런데 불과 2개월만에 가장 중요한 핵심 개혁과제가 무너진 것입니다. 참여연대, 인권실천시민연대, 한겨레신문의 비난 논평은 바로 이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천 장관이 사개추위의 이번 의결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도 변절이 아닌가요?
ⓒ 죽림누필
74141
작성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