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통일부가 한 명의 방문객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미 의회조사국(CRS) 소속의 한 연구원이 개성공단사업 자료수집을 위해 통일부에 면담을 요청한 것.
미국이 북핵 사태와 관련, 한국측에 대북제재를 요구하고 있는 시점에 CRS 연구원의 예고없는 방문이 포착되자 언론 역시 높은 관심을 보였다.
때맞춰 일부 언론에서는 “미 의회조사국, 비밀리 방한해 대북사업 전면조사”, “개성공단 관계자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 등 잔뜩 부풀려 보도했고, 통일부는 서둘러 진화하느라 진땀을 뺐다.
미 CRS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경우다.
CRS는 미국의회의 4대 입법보조기관(의회조사국, 의회예산처, 외계감사원, 기술평가원) 중 하나로 법제·경제·사회복지·외교국방 등의 분야에서 분석업무나 참고자료를 만들어 의회에 제공하고 있다.
특히 변호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등 각 분야 전문가 800여명이 만드는 'CRS 보고서'는 미 의회의 정책이나 법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미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기관으로 통한다.
바로 이런 CRS가 한국에도 추진되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논의가 햇수로 벌써 3년째를 맞고 있을 만큼 지지부진하다는 것.
‘한국판 CRS’로 불리는 국회입법조사처(가칭)에 대한 설립 논의는 2004년 국회개혁특위에서 본격 제기돼 입법기능 강화를 내걸고 추진돼 왔다. 하지만 국회사무처 비대화, 인사적체 해소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한 동안 표류해왔다.
이런 가운데 ‘바다이야기 사태’가 터지고 국회 내 자성론이 대두되자 지난 9월 1일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임채정 국회의장은 “재발방지를 위해서라도 입법조사처 설치가 시급하다”며 “이번 국회 내 신설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기존의 입법 과정을 사실상 주도해온 보좌진과 연구관만으로는 정책과 법안의 결과와 영향을 미리 예측하고 대책을 검토할 입법 역량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17대 국회들어 의원입법이 정부입법을 처음으로 앞지르는 등 양적으로 증가했지만 법률안의 완성도와 품질면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일부는 대표발의안 숫자 늘리기용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뻔히 부작용이 예상되는데도 그에 대한 치밀한 검토없이 ‘일단 발의하고 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입법활동으로 갈등만 키운 채 사라지는 법안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의원(보건복지위)측은 “의원입법의 경우 자체적으로 법제화할 능력을 갖춘 의원실은 별로 없다”며 “국회 법제실 역시 자구 수정이나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취합하는 정도지 조문을 기안해주는 역할은 아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위 소속의 모 의원실 보좌관은 “대략 이런 법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어도 법제화할 능력이 없어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며 “막상 법안을 만들어놔도 허점투성이일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과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제1의 입법기관인 국회의 입법시스템이 공적조직보다 보좌관 등 사적조직에 기대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특히 보건복지분야를 담당하는 입법정보연구관이 단 1명이라는 사실은 부끄러울 뿐”이라고 밝혔다.
입법조사처는 바로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고 의원들의 입법조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국감 이후 11월쯤 여야간 의견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 관련법안이 국회 운영위원회에 상정될 것”이라며 “국회도서관의 입법조사 기능을 대폭 확대해 입법전자정보실을 독립시키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국회 사무처 산하 법제실과 국회도서관 입법전자정보실을 통합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입법조사처는 연구조사관 55명 등 총 100여명으로 구성될 예정이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5년간 총 500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다.
정치권은 입법조사처 신설에 대체로 긍정적인 분위기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는 구체적인 입법조사처의 조직 구성안까지 검토되고 있으며, 한나라당도 신설 취지에 공감을 표명하고 있다. 민주당은 김효석 대표가 임채정 의장에게 직접 입법조사처 신설을 건의할 만큼 적극적이다.
한편 입법조사처 신설을 계기로 비대해진 국회 사무처에도 메스를 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회개혁론>의 저자인 숙명여대 박재창 교수(행정학)는 “국회 사무처는 행정관리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국회내부에 제3의 세력집단으로 성장해 있다”며 “국회 사무처를 대대적으로 개편해 분야별 전문가들은 입법조사처와 정책평가처, 지식정보처로 흡수하고, 최소한의 기관관리 업무만 담당하는 사무관리처로 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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