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은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대구 진천동에 사는 농업인 김선생은 부동산 중개업자의 권유로 땅을 팔았는데, 계약을 마치고 나서야 헐값에 팔았음을 알고는 그만 울화병이 나고 말았다.
별로 큰 땅도 아니고, 크게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땅이어서 원매자가 있다는 말에도 그저 덤덤했었다.
그런데 중개업자가 최근 이 부근에서 가장 유리한 가격이라고 수다를 떨며, 원매자가 이곳 물정을 잘 모르는 외지인인 것 같으니 빨리 계약을 해 버리자고 해 얼떨결에 계약서를 쓰고 계약금까지 받아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동산 중개업자는 별볼일 없던 농지로서 공시지가가 평당 2백만원인데 2백 50만원씩을 받아 주었으니 횡재한 것이라며 훗날 잔금을 받거든 소주라도 한잔 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흐뭇하던 기분도 잠시일 뿐, 며칠이 지나자 바로 이웃한 토지 주인인 친구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선생과 친구가 판 땅은 아파트를 짓기위해 건설회사에서 다른 사람을 내세워 사들인 것으로서, 김선생은 평당 2백 50만원을 받았으나 친구는 평당 4백만원 씩을 받았다는 것이다.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고, 손해 본 느낌이 들어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따져 보았으나 신통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원래 건설회사에서 땅을 사들일 때는 그렇게 누군가 대리인을 내세워 되도록이면 싸게 사려 하는 것이고, 한번 계약이 이루어지면 회사는 그 계약을 물러주거나 변경하거나 가격을 올려 주는 경우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김선생은 미리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신경과 무감각 탓으로 돌리고 잊어버리려 하였으나, 평당 150만원이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는 속이 편할 수 없는 것이다.
쓰라린 속을 애써 달래고 모든 것을 운수소관으로 돌린 김선생은 농협 결산총회에 참석하였다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주변의 동료 농업인들에게 자신의 경험담과 함께 누가 땅을 팔라고 하거든 그 이유와 개발정보를 알아보고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때 함께 어울려 있던 농협 지도계 최군이 김선생의 사연을 자세히 물어 보더니 한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후, 김선생은 지도계 최군의 안내로 농협 회의실에서 건설업체 임원과 마주 앉게 되었다.
지도담당 박상무가 먼저 설명을 했다.
“우리 조합원이신 김선생님과 건설업체 간의 토지 매매계약은 매우 불공정한 것으로 판단되어 이렇게 자리를 마련 했습니다. 서로간 이해와 양보로 좋은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
그러나 건설업체 측에서는 대단히 불편하고 불만스럽다는 태도를 과장하여 보이면서 대답했다.
“당사자간의 계약에 농협이 간섭하는 이유와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농협은 농업인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약은 당사자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불가침의 법률행위입니다. 그리고 계약자유의 원칙은 자유 민주주의의 근본원칙이며,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옛날에는 그랬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계약은 자유가 아니라 계약은 공정히 하라는 것이 현대 법의 정신입니다. ”
“그러나 이미 계약은 끝났고, 당사자인 우리쪽은 변경이나 취소의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 계약은 토지의 개발계획과 전망을 모르는 상태에서 심히 낮은 가격으로 이루어진 불공정계약입니다.”
“어쨋든 계약은 계약이고, 우리는 변경할 뜻이 전혀 없으며, 소송을 해도 승산은 100% 우리쪽에 있을 것입니다.”
“아니죠, 김선생은 그 계약 당시에 아무 것도 몰랐기에 그런 계약을 한 것이므로 계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법치국가입니다. 법에 따른 계약을 누가 취소할 수 있습니까?농협이 조합원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워 바쁜 사람을 붙들고 ....... ”
“정확히 법률에 정한대로만 말씀 드립니다. 김선생의 계약행위는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가 확실하므로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는 『농업인 법률구조 사업』의 실행으로서 우리 농협과 대한 법률구조 공단이 공동으로 김선생을 대신하여 법률적인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땅 몇평의 가격문제에 그런 엄청난........ 만약 내가 이 자리를 거부한다면 어쩔 것입니까?”
“바로 소송절차에 들어갑니다. 토지 매매 계약 취소 청구소송, 그리고 건축금지 가처분이 뒤따르겠지요.”
“소송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인데......얼마 안되는 금액 때문에 김선생이 생업도 제쳐 두고 바로 소송을 한다......? ”
“김선생은 자신의 일만 하십니다. 소송과 가처분은 대한 법률구조공단에서 변호사가 나서서 대행해 주고, 관련 비용은 전액 농업인 법률구조기금에서 무제한 지원됩니다.”
“계약 취소에.....소송에.....건축금지.....비용의 무제한 지원....이건 건설 사업자에 대한 위협입니다”
“위협으로 느껴져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물정이나 부동산 정보에 어두운 농업인 조합원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 뿐입니다.”
“법률구조공단이라는 것이 어디 소속입니까? 시민단체인가요? 아니면 농협 자회사 인가요?”
“정부 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 국영 로펌인 셈이군.....”
“비슷하게 맞습니다.”
“소송비용을 무제한으로 댈 수 있을까요? 농협이 개별 농민 한사람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비용이라야 수십만원이 고작인데.”
“농협에서 미리 마련해 둔 무료구조기금이 200억이 넘습니다. 또 해마다 수십억원 씩 늘어나고 있고요.”
“국영 로펌에...... 농협까지 나선다...... 알았소, 가격에 대해 다시 논의해 볼 수 밖에.......”
그로부터 몇시간후, 협상은 땅값은 양쪽주장의 중간을 잡아 평당 330만원으로 결정되었다.
김선생은 추가로 받게 된 땅값보다도, 막막하던 외로움에서 벗어난 것과 새로 얻은 자신감이 더 큰 소득이라며 농협과 법률구조공단에 한잔 사겠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건설업체측 사람이 모두에게 한잔 사겠다고 했다.
“오늘 새로운 것을 무척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배운 노하우는 술값이 아깝지 않아요. 그리고 이제 농업인은 물정에 어두운 것이 아니라 가장 밝은 사람이군요. 농협에, 국영 로펌까지 나서주고, 이제는 우리 사업가가 봉이 되는구만, 허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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