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을 상대로 싸움을??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깨지........
“무슨 소리, 우리 회사 모종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관리를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지.”
“아니, 내가 오이농사를 처음 짓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모종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
“글쎄, 이런 식으로 떼를 쓴다고 해서 우리가 양보할 것 같습니까?”
며칠째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
충남 연기군 남면에서 대형 자동화 온실을 갖추고 오이농사를 짓는 임선생은 유명한 종묘회사의 광고를 보고 올 봄 오이농사는 그 유명한 회사의 모종을 주문해서 심었다.
그런데, 심고나서 몇주일이 지나자 오이 모종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오이농사는 모종단계에서 조금이라도 미흡하거나 부족한 게 있으면 끝까지 문제가 계속되는 것을 잘 아는지라 임선생은 바짝 긴장했다.
그래서 각 부문별로 점검을 다시 해 보았다.
온실내의 온도와 습도, 조명, 비료, 농약, 병해충, 이산화탄소 농도와 환기, 양액의 산도와 성분, 자동화 프로그램.......거듭 거듭 살펴봐도 아무데 에서도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문제만 남는다.
임선생은 모종 몇개를 포트째로 테이블에 올려 놓고 면도칼과 가위로 포트를 잘라 가며 오이모종의 상태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 결과 모종의 뿌리 발육상태가 예년의 정상적인 것과 약간 다른 점이 발견되었고, 접붙인 자리의 활착, 유합된 부분이 이상했다.
종묘회사에 전화를 걸어 발견된 이상소견을 얘기하고 어찌된 것인지 물었는데, 그것은 이상이 아니고 그 품종의 고유한 특징이라며 나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종묘회사의 말을 믿고 정상적으로 자라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것이 많아 다시 종묘회사에 찾아가 지난번 포트를 해체하여 조사했을 때 찍어 두었던 사진과 함께 임선생의 의견을 제시하자, 그제서야 이사람, 저사람이 관심을 보이더니 마지막으로 육종담당 박사라는 사람이 현장에 까지 와서 둘러보고 돌아갔을 뿐, 어떤 조치도 없었다.
육종 박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기다려 보자는 것이고, 그 후에는 전화를 해도 통화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업담당자와 전화로 승강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임선생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유명한 종묘회사, 주인이 다국적기업이라 세계에서 손꼽는 재벌이며, 약소국은 정부도 꼼짝 못한다지, 실력있고 알아주는 유능한 인재들이 우굴우굴 할텐데, 내가 그들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까?
싸울 수는 있겠지만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이기지 못한다면 싸울 필요도 없겠지. 아니, 이기지 못할 싸움을 벌였다가 나중에 보복이라도 당해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올해 농사를 그르치게 되었는데, 이미 그른 것 같은 데 마냥 참고 기다려 줄 수는 더욱 없는 일이고...... 임선생은 고민만 쌓여 간다.
농사짓는 일보다도 이런 분쟁이 더 힘들다.
갑자기 오이농사가 재미가 없어졌다.
모종이 말썽을 부리면서부터 일하는 손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가 농협에서 『1/4분기 운영의 공개 자료』가 배달되었기에 한번 건성으로 주욱 훑어보고는 구석에 던져 두는데, 맨 뒷장의 공지사항에 평소 잘 안보이던 말이 보여 다시 들여다 보았다.
「농업인 무료 법률구조사업 안내」....... 농업경영과 생활 과정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을 대상으로......농업인이면 모두 무료로....! 얼른 농협에 전화를 걸었다.
임선생의 사정을 들어본 뒤 한시간 쯤 지나 담당인 김과장이 달려왔다.
그리고, 온실 현장에서 중앙회에 전화로 물어가며 절차와 방법, 현장의 조치사항을 하나하나 챙겨 나갔다.
그리고 사흘 후, 그토록 콧대가 높던 종묘회사에서 사람이 나왔다.
남면농협의 김과장이 임선생을 대신해서 종묘회사 책임자와 마주 앉았고, 회사쪽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종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신 것 같은 데, 우리 회사는 지금까지 한번도 모종에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아마 사후관리에 문제가 있었음이 확실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는 세계적인 종묘회사이고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사후관리에 문제가 전혀 없었음을 확인 했습니다. 여기 자동화 시설의 모든 기록이 입증합니다. 군 농업기술센터와 도 농업기술원, 충남대학교에서 모두 모종이 잘못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다국적기업인 우리 종묘회사는......”
“잠깐, 다국적기업, 강대국의 영향력, 모두다 잘 압니다. 그러나 그런 건 모두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정부일 때 힘을 썼지요.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그래도 농민 한 사람과 농협직원 한 분의 힘으로는 벅차실 텐데......” 말과 태도는 부드럽지만 내용은 공갈이며 무서운 협박이 숨어있는 한마디,한마디.....임선생은 숨이 차오른다.
그러나 농협 김과장은 의외로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한다. “이것은 농협이라는 농민 조직과 대한법률구조공단, 그리고 농촌 지도기관과 학계까지 동원되어 대한민국의 법률에 따른 농민보호 절차를 밟는 것입니다. 결국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지게 될 지, 자명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서 종묘문제는 제쳐 두고, 농업인 법률구조사업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문답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농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농협과 대한법률구조공단이 함께 나서서 농민을 대신해서 소송과 강제집행을 해 주며, 그 과정에서 필요한 비용까지도 모두 농협중앙회가 마련해 준 기금 200억에서 지원된다는 것,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농민을 억울하게 하고서 무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 이런 무료법률구조제도는 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보다도 우리나라가 가장 앞서있고,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얼마 후, 종묘회사 책임자는 대화 내용을 정리해서 본사에 보고하고 여러 차례 장시간 통화하더니 최종 합의안을 제시했다.
“임선생 농장의 오이 생육부진은 우리 회사의 종묘에도 일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므로, 관련 피해를 다 배상하겠습니다. ”
“손해배상금은 오이 모종 값이 아닙니다. 오이가 정상적으로 자랐을 경우 재배 농가에서 얻을 수 있는 예상수입 전액을 배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상수입을 어떻게 계산하나요? 매년 오이시세가 다르고, 수확량도 편차가 큰데......”
“수확량은 귀 회사의 홍보물에도 잘 나타나 있고, 농촌진흥청의 표준 수확량 보고도 있지요. 오이시세는 해당 온실의 출하시기에 맞추어 최근 3년의 도매가격을 평균하도록 법률에 정해져 있습니다.”
곧 그 내용을 회사에 보고하자 법률대로 하라는 답이 왔고, 곧 오이의 예상수입 6천4백만원을 송금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번 사례를 계기로 우리회사의 종자와 종묘 모두에 품질인증제도를 채택하기로 했답니다. 농업인 법률구조 사업 덕분에 우리 회사도 경쟁력이 한단계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사장님께서 농협 쪽에 감사인사를 전하라고 하십니다.”
농업인 법률구조사업이 농업인 만을 위하는 사업에 머물지 않는다.
농업인과 거래하고 교류하고 부대끼는 모든 사업분야에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며, 혜택을 받는 농업인이나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 모두에게 이로운 상생의 사업인 것이다.
더불어 농업인 법률구조사업은 앞으로 FTA의 결과로 농업과 농산물시장이 개방될 때, 우리 농민의 권익을 지켜주는 유일한 방안, 확실히 준비된 방안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의 관심과 지원과 농업인의 참여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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